
강민석 · Minseok Kang
자동차 회화Automotive Fine Art
속도로 그린 현대인의 초상
강민석은 1980년 부산에서 태어나 동아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예술은 언제나 '움직임'과 '존재의 긴장'에서 출발한다. 그는 도시의 속도와 정지, 균열과 회복의 순간을 관찰하며, 그 안에서 인간의 감정과 정체성이 어떻게 흔들리고 재구성되는지를 탐구해왔다. 자동차의 형상을 처음 화폭 위에 올린 이후, 그것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내면과 현실 사이를 잇는 상징이 되었다. 자동차는 현실을 질주하는 도구이자, 내면의 힘과 욕망이 투영된 존재이며, 그를 통해 작가는 '인간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변화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의 회화는 물질과 행위가 결합된 감각적 기록이다. 물감을 긁고, 밀고, 흘리고, 덮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그는 화면 위에 시간의 흔적과 감정의 파편을 남긴다. 이는 단순한 회화적 제스처가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고 감정을 시각화하는 행위로 확장된다. 그의 화면에서 자동차는 때로 해체되고, 파편화되며, 폭발하는 색과 선의 충돌 속에서 다시 재구성된다. 그 과정은 외부 세계의 경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하고 내면의 불안을 마주하는 여정이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작가는 '보이지 않는 힘(Invisible Force)'을 찾아낸다. 그것은 물리적 에너지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감정의 진동이며,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생명력이다.
그의 작품에는 경계라는 개념이 중심에 놓여 있다. 강민석은 현실과 정신, 속도와 정지, 질서와 혼돈의 경계를 흔들며, 그 불안정한 순간의 떨림을 시각화한다. 화면 위에서 색은 폭발하고 선은 끊어지며, 표면의 균열은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 된다. 이러한 행위는 해체와 재구성을 반복하며, 존재의 불안과 회복을 동시에 담아낸다. 그는 남은 물감을 재료로 제작한 조형 작품을 통해 사라짐과 기억의 관계를 탐구하며, 덧없음 속에서도 지속되는 존재의 온도를 은유한다. 그의 회화는 표현주의의 계보 위에서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오가며, 회화에서 조형과 감각적 실험으로 확장된다.
강민석의 예술은 하나의 끝없는 여정이다. 그는 그림을 통해 내면의 충돌을 탐색하고, 보이지 않는 힘의 흐름을 시각화하며,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인간의 흔적을 기록한다. 그의 작업은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끊임없는 탐색의 과정이며, 외부의 경쟁이 아닌 스스로와의 싸움이다. 그가 남긴 흔적과 색의 파편들은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의 흔적이자, 존재가 남기는 빛의 궤적이다. 강민석은 이러한 여정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힘을 탐구하고 있다.
Original Painting작가의 생각
- 자동차를 그리지만, 그걸 그저 '자동차 그림'이라 부르기엔 무언가 더 있어 보인다. 당신의 작업을 어떻게 소개하겠나?
- 나는 자동차를 그리지만, 화면에서 말하려는 것은 한 번도 자동차였던 적이 없다. 내가 붙드는 것은 속도인데, 여기서 속도는 '빠르다'는 감각이 아니라 시간이다. 스퀴지로 물감을 밀어낼 때 화면에 남는 것은 달려간 거리가 아니라 지나가 버린 시간의 흔적이고, 그래서 화면에 남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시간이다. 자동차 회화라는 형식을 빌렸을 뿐, 내가 정작 그리는 것은 그 속도를 통과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 그렇다면 왜 하필 자동차인가. 다른 소재도 많은데, 굳이 자동차여야 했던 이유가 있나?
- 자동차에는 하나의 본능이 있다. 앞으로만 향하려는 힘, 멈추는 법을 모르는 질주의 충동, 목적지를 묻지 않고 속도 자체에 몸을 던지는 맹목 같은 것이다. 나는 그 기계적인 본능을 인간의 내면 바로 앞에 세워 둔다. 우리 안에도 자꾸만 앞으로 밀고 나가려는 충동이 있고, 동시에 그 질주가 어디로 향하는지 몰라 불안해하는 마음이 있다 — 나에게 작업은 그 둘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니 자동차는 내가 그리려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안의 속도와 벌이는 싸움을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 속도와 자동차를 다룬다는 점에서 20세기 초 미래주의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신의 작업은 미래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 겉으로는 닮아 보여도, 향하는 곳은 정반대다. 미래주의는 기계와 속도를 찬양했다 — 더 빠른 것이 더 아름답다고 믿었다. 나는 그 반대편에 선다. 이 시대는 이미 '더 빨리'를 강요하고, 나는 그 속도를 숭배하지 않는다. 다만 부수지도 않는다. 나는 속도를 통과해, 그 속도가 지워버린 것 — 인간의 내면과 지나온 시간 — 을 되찾으려 한다. 그러니 내 화면에서 형태가 해체되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드러냄이다. 미래주의가 기계를 향한 찬가였다면, 나는 그 질주 한복판에서 인간을 되찾으려 한다.
- 작업 방식이 독특하다. 붓이 아니라 스퀴지로 물감을 긁어낸다고 했다. 작업실에서 그 순간은 실제로 어떤 감각인가?
- 스퀴지로 아크릴 물감을 밀어내는 순간은 늘 조금 서늘하다. 한 번 지나가면 결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밀어낸 자리 아래로 먼저 칠했던 색이 언뜻 비쳐 올라올 때가 있는데, 나는 그렇게 겹쳐 쌓인 층을 '기억'이라 부른다. 손끝에 전해지는 물감의 저항감, 순식간에 끝나 버리는 그 짧은 긴장 안에는 무언가가 통과했다가 사라지는 시간이 통째로 눌려 있다. 그래서 나는 한 획을 긋기 전에 오래 망설이고, 긋고 난 뒤에는 그 자국을 다시 오래 들여다본다.
- 작업은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변해 왔다. 2년 전만 해도 캔버스에 자수실을 얹었는데, 지금은 그것마저 걷어내고 오직 스퀴지만으로 그린다. 왜 계속 덜어내나?
- 내 작업은 시대와 함께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한다. 그 변화 자체가 내가 그리려는 그림이다. 한때는 자수실로 규칙과 관계의 선을 얹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걷어내고 오직 스퀴지 하나로 화면을 민다. 덜어낼수록 더 정직해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림은 내 고민의 시계가 걸려 있는 시간이다. 나이가 들며 생각은 바뀌고, 타협하고 설득하고 서로 부딪혀 교차한다. 그 안에는 여전히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통과하며 겪는 여러 고통이 있다. 나는 그 흔들림을 숨기지 않고 화면에 남긴다 — 한 사람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해 가는가, 그것이 내 그림이 끝내 하는 이야기다.
- 작업이 갈수록 형태가 무너지고, 자동차를 알아보기 어려운 추상으로 나아간다. 왜 굳이 형상을 허무는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관객은 무엇을 보게 되는가?
- 나에게 왜곡은 파괴가 아니라 성장이다. 형태가 무너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오히려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자동차의 윤곽이 선명할수록 사람들은 '저건 자동차구나' 하고 멈춰 버리지만, 형상이 흩어질수록 관객은 그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무엇을 그렸는지 또렷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험과 불안을 그 빈자리에 끌어와 채운다. 나는 그렇게 떠오르는 얼굴이 결국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믿는다 — 앞으로만 내몰리는 속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우리 모두의 내면 말이다.
- 마지막으로, 작업을 직접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 그리고 이 모든 질주 끝에, 끝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 원화는 물감층의 두께가 화면 앞에 직접 서야 비로소 보이기 때문에, 실제 작품이 궁금한 분은 이메일로 문의를 주시면 된다. 원화는 Artsper, 사치아트, 싱귤라트, 아트마쥬르 같은 해외 아트 플랫폼을 통해서도 세계의 컬렉터를 만난다. 그리고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MINSEOK®'이라는 상표로 등록한 포스터 브랜드를 따로 세웠다 — 수채화 자동차 연작을 아트 포스터로 옮겨, 아마존에서 미국·캐나다·영국·독일 네 나라에 선보인다. 어떤 형태로 만나든 내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다. 그 앞에서 잠시 멈춰, 자기 안의 속도와 그 속도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것. 기계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달리지만, 인간은 그 속도 한복판에서 '나는 대체 무엇인가'라고 되묻는 존재다. 결국 나의 작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하나의 물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향해 긁고 겹치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