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석의 그림 앞에 선 관객은 폭발을 먼저 본다. 찢기는 색, 흩어지는 차체, 정지해 있는데도 굉음이 들리는 것 같은 화면. 그래서 사람들은 이 그림들이 빠르게 그려졌을 거라고 짐작한다. 폭발은 순간의 사건이니까, 그것을 그리는 일도 순간의 격정일 거라고.
짐작은 틀렸다. 이 연재의 두 번째 노트가 들여다보려는 것은 폭발이 아니라, 그 폭발을 만들어낸 손의 십 년이다. 그리고 그 십 년은 도구의 연대기이기 이전에 하나의 드라마다 — 화면 위에 풀려난 내면의 야수를, 화가가 조금씩 길들여 온 드라마. 드리핑에서 흘리기로, 흘리기에서 실로, 실에서 스퀴지로. 도구가 바뀔 때마다 야수와 화가의 거리는 조금씩 좁혀졌다.
이 역설 — 가장 빠른 그림이 가장 느리게, 가장 격렬한 화면이 가장 계획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 이야말로 그의 회화를 이해하는 두 번째 열쇠다.
뒷모습 위에 흘리다 — 2015년부터
이야기는 2015년 무렵의 화면들에서 시작된다. 강민석은 캔버스에 자동차의 뒷모습을 그렸다.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 — 이미 떠나가고 있는 차, 관객보다 앞서 달리는 차다. 그리고 그 위에 물감을 한 방향으로 드리핑했다. 떨어져 흐른 물감 줄기들이 형상을 조금씩 지워 갔고, 화가는 그 지워짐을 막지 않았다. 무언가를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라 무언가가 방금 지나갔음을 보여주는 그림 — 달리는 차와 그 차가 가려는 방향, 그의 회화의 기본 문장은 이때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주목할 것은 이 드리핑에 처음부터 방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방으로 튀는 충동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흐르는 궤적. 야수는 풀려났지만, 달릴 길은 정해져 있었다. 이후 드리핑은 점점 대담해진다. 화가는 캔버스를 벽처럼 세우고 그 위에서 대량의 물감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세워진 화면에서 중력은 오직 아래로 질주하는 속도가 되고, 흘러내린 줄기 하나하나가 낙하의 기록이 된다. 비평가 해럴드 로젠버그가 1952년에 쓴 문장이 여기 겹친다. "캔버스는 재현의 공간이 아니라 행위가 벌어지는 아레나다." 강민석의 세운 캔버스는 정확히 그런 아레나였다 — 다만 그 위에서 벌어지는 행위의 공동 주연이 중력과 시간이었을 뿐이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1896)에서 시간이란 시계처럼 균등하게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녹아 흐르며 서로 스며드는 지속(durée)이라고 썼다. 세워진 캔버스를 타고 내려오며 위쪽의 색이 아래쪽의 색으로 스며드는 물감보다 이 문장에 가까운 물질은 없을 것이다. 이 시기의 강민석은 시간의 초상을 그리고 있었다.

실 — 야수에게 건넨 첫 번째 고삐
흘리기는 자유였지만, 자유는 무분별을 낳는다. 화면 가득 풀려난 흔적들 앞에서 화가는 다음 도구를 집어 든다. 바늘과 실이다. 흘러내린 무분별한 흔적들 위로 실을 꿰매 넣어 화면을 통제하는 것 — 작가는 이 작업을 두고 정확히 이렇게 말한다. 내면의 야수를 통제하는 일이라고.
니체는 『비극의 탄생』(1872)에서 예술을 두 신의 긴장으로 설명했다. 도취와 충동의 신 디오니소스, 형식과 질서의 신 아폴론. 위대한 예술은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둘의 팽팽한 결혼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강민석의 화면에서 이 오래된 도식은 물질이 된다 — 흘러내린 물감은 디오니소스이고, 그 위를 한 땀씩 지나가는 실은 아폴론이다. 실은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야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고삐를 채우는 것이다.
바느질은 긁기와 정반대의 속도를 요구한다. 바늘이 캔버스를 뚫고, 실이 따라 들어가고, 다시 나온다. 이 동작에는 지름길이 없다. 폭주하던 화면 위에서 가장 느린 동작이 수행될 때, 통제는 억압이 아니라 대화가 된다. 도구들은 칼같이 교대한 것이 아니라 겹치고 되돌아오며 이어졌다 — 변화의 과정이 많았다고, 작가는 그 시절을 짧게 요약한다.

스퀴지 — 계획된 폭발
그다음 도구가 스퀴지다. 물감을 넓게 밀어붙이고 굳기 전에 긁어내는 도구. 흘리기가 중력에게 맡기는 일이었다면 스퀴지는 몸이 직접 밀고 나가는 일이고,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계획이다. 이미 계획된 형상을, 아주 계획적인 방식으로 밀어낸다 — 어디를 밀고 어디를 남길지가 손을 대기 전에 정해져 있다. 야수의 에너지는 그대로인데, 그 에너지가 지나갈 길을 이제 화가가 설계한다. 작가 자신의 기록이 이 방법론을 요약한다. "스퀴지로 긁어낸 흔적들은 지나온 시간의 잔상이고, 화면은 자동차가 달리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가는 공간이다."
한 번의 긁기는 한 번의 지우기이면서 동시에 한 번의 드러내기다. 지운 만큼 아래층의 색이 올라오고, 그 색은 며칠 전의 작업 — 즉 며칠 전의 자신이다. 마음에 들지 않아 통째로 덮어버린 화면, 며칠을 매달리고도 뒤엎은 구도까지, 덮는다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 두는 것이다. 이 화가에게 실패는 폐기물이 아니라 재료다. 물감층은 지질학과 같아서 파고들수록 이전 시간이 나온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1942)에서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리는 사나이를 두고 이렇게 썼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작업실의 아침마다 어제 덮어버린 화면이 바위처럼 그 자리에 있다. 다시 물감을 개는 손 — 그 손이 불행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카뮈는 팔십 년 전에 적어두었다.

방사형 — 쪼개면서 완성하다
그리고 지금. 최근의 화면에서 스퀴지는 더 이상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방사형이다. 자동차의 형상을 중심에서 바깥으로 쪼개면서 밀어낸다. 빅뱅처럼 폭발하는 파편들 — 그러나 이 폭발은 사고가 아니라 설계다. 십 년 전 화가는 야수가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았고, 실로 고삐를 채웠고, 스퀴지로 길을 정했다. 이제 그는 폭발 그 자체를 계획한다. 통제의 마지막 단계는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터뜨릴 곳을 정하는 것이다.
작가에게 이 통제의 드라마는 기법 이야기가 아니라 정체성 이야기다. 내면을 통제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단계와 받아들이는 단계를 거쳐 정체성을 완성해 간다는 것 —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그렇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타자로서 자기 자신』(1990)에서 정체성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이야기로 엮어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썼다. 서사적 정체성. 달리는 차와 그 차의 방향이라는 하나의 문장을 십 년 동안 고쳐 쓰는 일 — 강민석의 화면 연대기는 그 개념의 회화판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처음에는 지워지는 뒷모습이었다. 지금은 스스로 쪼개어 설계하는 폭발이다. 같은 자동차, 같은 질주 —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손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손이다.

화면은 몸의 기록이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1945)에서 세계를 아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라고 썼다. 강민석의 회화 앞에서 이 문장은 설명이 아니라 묘사가 된다. 화면에 남은 것은 생각의 결론이 아니라 몸이 통과한 시간이다. 드리핑의 줄기에는 2015년의 기울인 손목이, 흘러내린 층에는 세워둔 캔버스 앞의 기다림이, 실땀의 간격에는 호흡의 리듬이, 방사형 궤적에는 어깨의 회전이 남아 있다. 관객이 그 앞에서 느끼는 속도감은, 사실 한 사람의 몸이 화면 위에서 보낸 십 년의 총량이 번역된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오래 볼수록 다른 것이 보인다. 처음에는 폭발이 보이고, 다음에는 궤적이 보이고, 마지막에는 그 궤적을 만든 손이 보인다. 야수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제, 그 야수가 어디로 달릴지는 화가가 정한다.
다음 노트 ⟨강민석 읽기 No.3⟩은 2025년 가을의 선언 — RED LINE, 넘지 말라는 선과 넘어야 할 선의 이야기다.
참고 자료
· 강민석, Endless Force · Time Horizon · Timeleap · Endless Impact 시리즈 노트 — minseok.gallery · Friedrich Nietzsche,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 1872 · Henri Bergson, 『물질과 기억 Matière et mémoire』, 1896 · Harold Rosenberg, "The American Action Painters", ARTnews, 1952 · Albert Camus,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 1942 · Paul Ricœur, 『타자로서 자기 자신 Soi-même comme un autre』, 1990 · Maurice Merleau-Ponty, 『지각의 현상학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1945
이 노트의 도판은 모두 강민석 작가의 작품이며 © MINSEOK Studio. 무단 복제와 사용을 금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