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앞에 서면, 생각보다 먼저 눈이 움직인다.
한 점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가, 그 점에서 사방으로 튕겨 나온다. 빨강과 노랑, 청록과 흰빛의 띠들이 면도날처럼 곧게 뻗으며 서로를 가른다. 색은 탁하지 않고 오히려 사탕처럼 맑다. 화면은 어둡기는커녕 눈이 부시다. 강민석 작가의 ⟨Endless Impact⟩ 앞에서 우리가 처음 겪는 것은 어떤 의미가 아니라, 순수한 속도의 감각 — 빛으로 번진 속도다.

그런데 이상하다. 강민석은 십오 년 동안 자동차를 그려온 화가다. 자동차는 그의 처음이자 끝이었고, 단 한 번도 화면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그림 앞에서 우리는 자동차를 찾느라 눈을 헤맨다.
어디 있는가. 저 아래 은빛으로 뭉개진 형체가 차의 앞머리였을까. 색의 띠들 사이로 스치는 붉고 노란 파편이 부서진 차체였을까. 확실한 것은 하나다 — 자동차는 거의 사라졌다. 십오 년을 그려온 그 대상이 여기서 형태를 잃고, 빛과 색의 속도 속으로 녹아 버렸다. 프랑스의 사상가 폴 비릴리오는 일찍이 ‘사라짐의 미학’을 말했다. 속도가 어느 문턱을 넘어서면 대상도, 그것을 바라보던 눈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강민석의 화면은 바로 그 문턱을 넘은 자리에서 그려진다.
그러나 이 눈부심을 오래 마주하고 있으면, 처음의 황홀이 조금씩 다른 것으로 바뀐다.
이 화려함은 축제의 화려함이 아니다. 너무 빠르고, 너무 밝고, 멈출 줄을 모른다. 강민석의 색채가 아름다운 만큼, 그 아름다움에는 어딘가 숨을 고를 수 없게 만드는 데가 있다. 눈부신 표면 아래에서 무언가가 쉼 없이 몰아붙이고 있다. 그 무언가의 이름을 찾는 것이, 이 화가를 읽는 일의 핵심이다.
강민석 자신은 그것을 이렇게 적었다 — “나는 늘 넘어서야 할 경계를 인식한다. 그 경계를 쉽사리 넘지 못하는 나 자신과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순간, 나의 내면은 작품으로 전이된다.” 화려함의 안쪽에는 고통이 있다.
이 고통의 정체를, 한 사람의 철학자가 정확히 짚어 준다.
한국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한병철은 우리 시대를 ‘성과사회’라 불렀다. 과거의 사회가 바깥에서 ‘하지 말라’ 금지하며 사람을 눌렀다면, 오늘의 사회는 안에서 ‘너는 더 할 수 있다’ 속삭이며 사람을 몰아붙인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의 이름으로, 자기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래서 한병철은 성과사회를 ‘자기 착취의 사회’라 했다. 착취하는 자가 곧 착취당하는 자다. 그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소진과 우울 — 번아웃이다.
강민석의 자동차가 바로 그 존재다. 계기판의 붉은 선을 향해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자, 멈추면 지고 넘으면 부서지는 자리에서 끝없이 가속하는 자. 그의 화면이 그토록 밝고 빠른 것은, 그것이 승리의 색이 아니라 멈추지 못하는 자의 아드레날린이기 때문이다. 눈부신 속도는 곧 자기를 태우는 속도다.


흥미로운 것은, 강민석의 자동차를 오래 들여다본 이들이 하나같이 기계가 아니라 사람을 읽어냈다는 점이다.
한 평론은 그의 작업을 ‘자동차로 보여주는 시간, 공간, 열망, 그리고 정체성’으로 요약했다. 겉은 매끈한 자동차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이 읽어낸 것은 시간에 쫓기는 존재, 열망과 불안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아였다. ‘자동차 그림’이라는 손쉬운 이름표가 이 작업 앞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까닭이다. 강민석의 화면은 자동차의 초상이 아니라, 자동차를 빌려 그린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이 자화상은 어디를 향해 달리는가. 화면은 이상하게도 그 답을 주지 않는다.
강민석의 폭발에는 방향이 없다. 색의 띠들은 한 점에서 위로, 아래로, 좌우로,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뻗어 나간다. 무섭게 빠른데,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십구 세기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이 감각을 ‘자유의 현기증’이라 불렀다. 절벽 끝에 선 사람은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동시에, 스스로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아찔해진다. 그 아찔함은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기 때문에 찾아온다. 키르케고르는 그것을 불안이라 불렀다.
강민석의 방사형 폭발은 그 무한한 가능성의 그림이다. 모든 방향이 열려 있다는 것은 어느 방향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 열림 앞에서 인간은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불안하다. 그의 자동차가 형태를 잃는 것은 속도 때문만이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자는, 자기 형태마저 잃는다.
그리고 이 모든 방향은 아직 오지 않은 곳, 미래를 향해 있다.
질주는 언제나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향한 몸짓이고, 충돌은 그 미래가 눈앞으로 들이닥치는 순간이다. 강민석은 그 순간을 정지시켜 화면에 붙든다. 그래서 그의 그림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팽팽함은 설렘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이다 — 절벽 끝의 그 아찔함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과 부서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한 화면 안에서 같은 빛으로 타오른다. 작가의 말대로 그 충돌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불러오는 힘”이다. 불안은 그에게 끝이 아니라, 무언가 새로 태어나기 직전의 떨림이다.
이 끝없는 가속에도 쉼표가 있다.
⟨Paint Desert⟩ 연작 앞에서 강민석의 자동차는 다시 온전한 형체로 돌아온다. 광활한 색의 사막 위에 한 대가 홀로, 작지만 분명하게 놓인다. 폭발도, 분열도, 방향의 현기증도 없다. 속도를 잠시 내려놓은 그 자리에서 자아는 다시 하나가 되고, 미래는 잠깐 들이닥치기를 멈춘다. 사막의 고요한 한 대와 폭발의 눈부신 중심 — 강민석의 두 극(極)이다. 하나는 숨을 고르는 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숨을 참는 자리다.

강민석은 자동차를 그리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그리는 것은, 화려함과 고통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눈부신 색채는 고통을 감추는 가면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고통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아드레날린이 짜릿함이면서 경보이듯, 전속력의 자유가 곧 자기를 태우는 불이듯, 미래를 향한 질주가 곧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듯. 강민석 작가는 이 어려운 진실을 어둡게 그리지 않고 눈부시게 그린다. 그것이 이 화가의 남다른 용기다. 그는 우리에게 고통을 보여주면서, 그 고통마저 아름다울 수 있음을 함께 보여준다.
그의 그림 앞에서 눈이 먼저 빨려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자동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전속력으로 달리는 한 사람의 내면을 — 화려하고, 아프고, 아직 방향을 찾고 있는 그 마음을 —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노트 ⟨강민석 읽기 No.4⟩는 전혀 다른 얼굴에서 시작한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어떻게 기억의 그릇이 되는지 — 가장 가벼운 소재로 가장 무거운 시간을 담는 법에 대한 이야기다.
참고 자료
· 강민석 작가노트 — ⟨Endless Impact⟩·⟨Paint Desert⟩ 시리즈 · minseok.gallery · 한병철, 『피로사회 Müdigkeitsgesellschaft』, 2010 — 성과사회와 자기 착취 · 쇠렌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Begrebet Angest』, 1844 — 자유의 현기증으로서의 불안 · 폴 비릴리오, 『사라짐의 미학 Esthétique de la disparition』, 1980 — 속도와 사라짐 · 「자동차로 보여주는 시간, 공간, 열망, 그리고 정체성 — 강민석 개인전」 평론, 2025
이 노트의 도판은 모두 강민석 작가의 작품이며 © MINSEOK Studio. 인용한 사상은 이미지를 싣지 않고 출처만 밝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