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스르는 능력, Timeleap
'타임리프(Timeleap)'는 SF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즐겨 쓰는 말이다.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로, 미래로 건너가는 능력 —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수없이 만나온 그 익숙한 상상이다. 물리학이 증명한 개념도, 우리가 실제로 쥔 능력도 아니지만,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본 소망에 붙은 이름이다. 시간을 거스르고 싶다는 소망.
강민석은 이 대중적인 상상의 언어를 자기 연작의 이름으로 데려온다. 스크린 속에서만 가능하던 그 도약을, 그는 물감과 실로 화폭 위에서 실제로 감행한다. 그 순간을 강민석은 '터널 라인의 순간'이라 부른다. 현실에서 과거로, 다시 미래로 건너가는 좁고 빠른 통로. 우리가 앞서 다섯 번째 노트에서 만났던 '뒤집힌 경계(Reversed Boundary)' — 캔버스의 천을 뒤집어 젯소 없는 뒷면에 그려 넣은 정신세계 — 를 기억한다면, Timeleap은 그 경계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문이다. 거기서 뒤집혔던 것이 앞뒤였다면, 여기서 열리는 것은 시간의 앞뒤다.
빠른 것을 그려온 화가가 이번엔 시간을 그린다. 그런데 그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조금 이상하다. 과거로도 가고 미래로도 가지만, 어디로 가든 그의 붓끝이 결국 되돌아오는 자리는 언제나 '지금의 나'다. 이 노트는 그 이상한 왕복을 따라간다.
어긋난 두 속도의 동거
Timeleap 연작 앞에 서면 먼저 눈에 걸리는 것은 속도의 충돌이다. 화면은 여느 강민석의 그림처럼 질주한다 — 시속 200킬로미터로 밀려나간 물감, 빛으로 녹아버린 형체. 그런데 그 위에 실이 얹혀 있다. 바늘로 한 땀 한 땀, 시속 몇 센티미터의 느림으로 놓인 자수다.
한 화면 안에서 두 속도가 동거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질주와, 손이 오래 머문 바느질. 강민석은 이 어긋남을 굳이 봉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란히 둔다. 빠르게 폭발한 색 위로 느린 실이 지나갈 때, 그림은 한 장면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의 겹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자수는 특정한 시기의 언어다. 2022년의 Timeleap II부터 IX까지에만 실이 들어가 있고, 2023년 이후(X 이후)의 작업에는 자수가 없다. 실이 있는 그림과 없는 그림이 둘 다 존재하며, 그 사이를 하나의 통로가 잇는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자수는 그 통로의 입구에 놓인, 시간을 손으로 만졌던 흔적이다.

운명은 결국 그곳으로 향한다
Timeleap의 핵심에는 강민석의 한 문장이 놓여 있다. 과거로 돌아가 나의 선택을 바꿔도, 현재의 나는 결국 지금과 같다. 미래로 가도, 거기 있는 나는 지금 나의 모습이다. 어디로 도약하든 이야기는 '작가의 지금'으로 돌아온다.
이 직관은 우리가 흔히 아는 시간여행의 문법과 정반대다.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의 그 유명한 '나비효과' — 브라질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하면 텍사스에 토네이도가 인다는 이야기 — 는 아주 작은 차이가 시간을 지나며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완전히 다른 결과로 갈라진다고 말한다. 발산(發散)의 시간이다. 강민석이 보는 것은 정확히 그 반대다. 과거를 바꿔도 결과는 다시 '현재의 나'라는 한 점으로 모여든다. 수렴(收斂)의 시간. 두 상(像)은 우열이 아니라, 같은 시간축 위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나란히 선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갈림길의 정원」은 한 선택의 순간마다 시간이 여러 갈래로 무한히 갈라지고, 그 갈래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를 그렸다. 활짝 펼쳐진 부채 같은 시간이다. Timeleap은 그 부채를 다시 접는다. 아무리 다른 갈래를 시도해도 결국 하나의 살로 모이는 부채. 강민석의 그림에서 왜곡된 자동차가 매번 같은 소실점으로 빨려 드는 것처럼, 그의 시간도 언제나 한 자리로 접혀 돌아온다.
그렇다면 이 수렴은 체념일까. 강민석에게서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조용히 곁에 선다. 니체는 같은 삶이 무한히 되풀이되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영원회귀),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 하기보다 '지금 이대로'를 끌어안으라고 했다(아모르 파티, 운명애). '내일 일어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고전적 운명론이 대개 체념으로 기우는 것과 달리, 강민석의 수렴은 긍정으로 방향을 튼다. 결국 이 자리로 돌아온다는 사실이 두려움이 아니라 화해가 된다. 되돌림의 유혹 앞에서 현재를 끌어안는 따뜻한 운명론 — 그것이 Timeleap이 시간여행의 언어로 다시 쓴 우화다.

실로 붙든 물감의 힘 — 자수라는 통제
그렇다면 왜 실인가. 강민석의 대답은 명료하다. 그림 속에는 패턴이 있고, '통제'가 있다. 자수는 물감의 분출된 힘을 실로 붙들어 두는 장치다.
그런데 이 통제의 언어는 Timeleap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작가에 따르면 실은 그 이전 ⟨끝없는 힘(Endless Force)⟩ 연작에서 이미 화폭에 올라 있었다. 거기서 자수가 붙든 것은 시간이 아니라 '야수' — 2017년 무렵부터 그의 화면에 나타난 내면의 그림자이자 분노였다. 분출하는 야수의 힘을 실이 한 땀씩 눌러 다스렸다. 그리고 이야기가 Timeleap으로 건너오면서, 실이 통제하는 대상은 야수에서 '시간'으로 옮겨간다. 통제하는 손길은 그대로인데, 붙드는 것이 바뀐 것이다. 강민석의 시리즈들이 저마다 따로 놀면서도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는 말은 이런 자리에서 가장 또렷해진다 — 같은 바늘이 야수를 다스리다가, 이제 시간을 다스린다.
생각해 보면 실과 물감은 섞일 수 없는 관계다. 하나는 흘러 번지고, 하나는 팽팽하게 당겨져 선을 긋는다. 성질이 다르고, 서로 스며들지 않는다. 그런데 강민석은 이 둘을 억지로 화해시키지 않으면서도 한 화면에 공존시킨다. 섞이지 않는 채로, 둘은 하나의 현전(現前)한 잔영으로 희석된다. 폭발하려는 물감의 힘을 실이 한 땀씩 눌러 붙잡는 순간, 통제되지 않던 속도가 비로소 하나의 패턴으로 안정된다.
실을 매개로 삼는다는 점에서 몇몇 작가가 곁에 떠오르지만, 방향은 저마다 다르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옷과 침구 같은 사적인 천을 찢고 다시 꿰매며 바느질을 마음의 언어로 삼았다. 그에게 바늘은 상처를 잇는 도구였다 — "The needle is used to repair damage"(Louise Bourgeois). 부르주아가 실로 상처를 아문다면, 강민석은 실로 시간을 붙들고 물감의 힘을 통제한다. 회복이 아니라 지배 쪽에 그의 바늘이 놓인다.
직조가(織造家) 안니 알베르스는 베틀의 격자라는 엄격한 제약 안에서 실의 구조와 규율을 사유했고, 알리기에로 보에티는 자수를 질서와 무질서, 그리고 시간을 담는 그릇으로 썼다. 다만 보에티가 색 선택을 장인들에게 넘겨 통제를 '분산'했다면, 강민석의 실은 통제를 자기 손 하나로 '집중'시킨다. 닮은 표면 아래 갈라지는 결정적 차이 — 강민석의 자수는 치유의 서사가 아니라, 시간을 각인하고 힘을 붙드는 손의 규율이다.

모든 것의 중심에 놓인 나
Timeleap의 자동차들은 원근법의 선을 타고 왜곡된다. 다른 연작과 비슷한 표현을 쓰지만, 강민석은 이 작업을 자기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기하학적으로 일그러진 자동차는 그에게 '시간 속에 갇힌 현대인'의 초상이다. 질주하도록 만들어진 기계가 화면 안에서 붙들려, 앞으로도 뒤로도 온전히 가지 못한 채 시간의 한 겹에 걸려 있다.
이 정지의 감각은 전시장에서도 확인된다. 2025년 서울 코너갤러리의 《A DREAM CAR : 꿈의 질주》에서 Timeleap은 Paint Desert와 나란히 걸렸다 — 질주를 이야기하는 그림들이 정작 질주를 멈춘 자리에서 관객을 맞았다. 달리는 것을 그리되, 그 달림을 붙잡아 보여주는 것. 그것이 강민석이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것이 한 점으로 모인다. 강민석은 말한다. 모든 환경은 '나'를 중심으로 희석되고 바뀐다고. 과거로 가든 미래로 가든, 실이 있든 없든, 자동차가 어떻게 왜곡되든 — 이야기의 소실점에는 언제나 작가 자신이 놓인다. 시리즈들은 저마다 따로 놀 수 있지만, 모든 이야기는 결국 이어지고, 그 이음매의 한가운데에 '나'가 있다.
다음 노트는 이 중심에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따라온 실과 속도, 뒤집힌 경계와 수렴하는 시간은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켜 왔다. 강민석 읽기는 계속해서 그 한 점 — 작가 자신 — 으로 접혀 들어간다. 다음 노트로 이어진다.

참고 자료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1882) — '영원회귀(die 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는 아포리즘 341에서,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는 제4권 서두(아포리즘 276)에서 처음 제시됨.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1883~1885).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N. Lorenz), 「Deterministic Nonperiodic Flow」(Journal of the Atmospheric Sciences, 1963) 및 '나비효과' 강연(AAAS, 1972) — 초기조건에의 민감한 의존성(카오스 이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갈림길의 정원(El jardín de senderos que se bifurcan)」(1941), 『픽션들(Ficciones)』(1944) 재수록.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명제론(De Interpretatione)』 9장 '내일의 해전' 논증 — 논리적 운명론의 고전. 운명론(fatalism)과 결정론(determinism)의 구분은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talism' 항목 참조.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 «Louise Bourgeois: The Woven Child», Hayward Gallery, London, 2022.2.9–5.15. 인용 및 자료 출처: Hauser & Wirth(hauserwirth.com), MoMA 'Fabric Works'(lb.moma.org), Southbank Centre, Crafts Council. 안니 알베르스(Anni Albers), 『On Weaving』(1965) — The Textile Atlas, Galvin Brothers 'Thread as Thinking'. 알리기에로 보에티(Alighiero Boetti), 자수 연작 «Arazzi»·«Ordine e Disordine» — Fowler Museum UCLA, Ben Brown Fine Arts.
저작권 고지: 니체·로렌츠·보르헤스·아리스토텔레스는 사상을 곁에 세우기 위한 참조이며, 루이스 부르주아·안니 알베르스·알리기에로 보에티는 유사한 매재(실·천)를 공유하는 동시대·근현대 작가로서 '곁에 세우기(닮은 점과 결정적 차이)'를 위해서만 언급되었다. 계보나 영향 관계를 주장하지 않으며, 저작권이 존속하는 외부 작가의 도판은 게재하지 않고 텍스트 인용만 최소한으로 사용했다. 부르주아 인용문은 여러 출처(Hauser & Wirth, Crafts Council 등) 교차 확인. 게재 도판은 모두 강민석의 작품이다.





